고구려대장간마을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남진 정책의 전초기지 기능을 했던 군 요새인 보루 유적과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여, 아차산 보루(堡壘, fortress)의 역사적 의미를 시민들에게 홍보하고자 설립되었다.
수도권 시민들의 휴식처로만 알려진 아차산이 우리 고대사의 역사 현장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4년 구리시의 지표조사 때부터이다. 1990년대 후반, 구리시는 학계와 손을 잡고 아차산 일대 보루 유적들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고, 2010년까지 계속된 학술조사는 아차산이 남한의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하였다.
고구려대장간마을 박물관에서는 아차산 보루의 조사내용을 집대성한 상설전을 통해 1,500년 전 아차산에 주둔했던 고구려 병사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정기적인 특별전을 통해 다각적으로 조명한 고구려 문화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다양한 전시는 자칫 잊힐 뻔한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가 민족 고대사로서 우리 시민들 곁에서 당당히 자리하는 데 튼실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출처 : 고구려대장간마을 홈페이지)
주몽,
새 나라 고구려를 세우다.
생각건대 옛날에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처음 나라를 세우심은 이러하다.
북부여 천제(天帝)의 아드님에게서 나오시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셨다.
알에서 깨어 세상에 내려오시니 태어나심에 성스러움이 있고 ㅁㅁㅁㅁ하였으며 ㅁㅁ수레를 명하시어 남으로 내려오셨다.
오시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만나게 되었다.
왕께서 나루에 이르러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늘 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신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잇고 거북을 떠오르게 하라" 하시니 이 말에 응하여 즉시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 떠올라 이에 강을 건너셨다.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성의 산 위에 수도를 세우셨다.
세상의 왕위를 기뻐하지 않으시니 이에 (하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으시니 왕은 홀본의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승천하셨다.
414년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문(廣開土大王陵碑文)」 의 첫 머리에 있는 내용이다. 5세기의 고구려 사람들은 건국시조 주몽이 천제와 하백의 혈통을 이은 신성한 존재로 믿었고 주몽과 그의 어머니 유화를 모신 사당에 제사 드렸다. '주몽'은 부여족의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이 새겨지기 수백 년 전, 아직 부여가 만주벌을 호령하고 있을 때, 활을 잘쏘아 주몽이라 불린 사람은 부여 땅 곳곳에 여럿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잡은 5세기, 주몽은 이 나라의 기초를 놓은 위대한 인물, 고구려 왕가의 혈통이 하늘과 닿게 하는 신성한 영웅이었다. 이 시대의 고구려 사람들에게 주몽은 고구려를 이 세상에 탄생시킨 뒤, 용의 머리를 딛고 자신의 근원인 하늘로 되돌아간 단 한 사람의 신적 영웅이었다. 옛 이야기에 의하면 부여왕 해부루(解夫妻)는 왕위를 이을 아이를 달라고 산천에 기도하다가 곤연이라는 큰 못 가 바위 밑에서 금개구리 모양의 아기를 발견하여 궁으로 데리고 와 길렀다고 한다. 이 아이가 해부루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금개구리왕, 곧 금와왕이라 불렸다.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潮水) 곁에서 한 여자를 만나 왕궁으로 데려오는데, 이 여자가 곧 주몽의 어머니 유화이다. 자신이 큰 강의 신 하백의 딸이라고 한 유화는 부여 왕궁에 들어온 뒤 오래지 않아 한 아이를 낳는데, 이 아이가 바로 주몽이다.
유화는 주몽의 아버지가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激)라고 했다. 설화에 따르면 유화가 처음 낳은 것은 커다란 알이었고, 이를 불길하게 여긴 금와왕은 이 알을 버리도록 했다. 그러나 새와 짐승마저 이 알을 귀히 여기고 지켜 주자 다시 왕궁으로 가져오게 했는데, 때가 되자 알 속에서 한 아기가 나왔다. 이 아기는 나면서부터 활을 잘 쏘아 '주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았다. 신화 속에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는 하백의 세 딸 가운데 맏이로 자매들과 함께 물 밖으로 나들이 나왔다가 천제의 아들 해모수를 만나 그와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해모수가 유화를 두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자 하백은 딸이 신중하게 처신하지 못했다고 크게 꾸짖은 뒤 우발수라는 강으로 귀양을 보낸다. 어부들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우울한 날을 보내던 유화가 '쇠그물'에 걸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금와왕은 이 이상한 여자를 부여 왕궁으로 데려 온다. 왕궁에서 자신의 몸을 좋아오는 햇볕을 핀 유화는 곧 임신한 몸이 되어 큰 알을 낳는다. 버려졌다가 되돌아온 그 알 속에서 주몽이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 쪽이 신성한 하늘과 관련된 데에 더하여 주몽의 어머니는 물의 세계를 지배하는 하백의 딸이다. 주몽은 부계와 모계 모두 인간이 아닌 신의 계보에 닿아 있는 존재였다. 현실세계에서 주몽은 부여왕 금와의 서자(庶子)였다. 금와왕에게는 정비(正妃)가 있었고 둘 사이에 난 왕자가 일곱 있었으며 이들과 주몽은 궁궐 안에서 함께 자랐다. 일곱 왕자의 맏이인 대소(帶素)가 뛰어난 활솜씨를 자랑하던 주몽을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넘볼 수 있는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하면서 왕실 안에서는 갈등과 분란이 일기 시작하였다. 대소는 금와왕에게 자신을 비롯한 일곱 왕자와 주몽을 신분지위상 구분해 달라고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주몽은 왕실의 말을 기르는 일을 맡게 되었다. 유화는 아들 주몽이 부여를 떠나지 않으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음을 직감하게 되었고 이에 대비한다. 어머니 유화의 도움으로 주몽은 준마를 골라 비루먹은 말처럼 보이게 기른 뒤 왕으로부터 이 말을 얻는다. 일곱 왕자가 주몽을 없애기로 굳게마음먹을 즈음 왕자 주몽은 어머니 유화, 임신한 부인 예씨를 남겨 둔 채, 자신을 따르던 몇 사람과 함께 왕의 허락도 없이 부여를 떠나고 만다. 스스로 왕자에서 망명객으로 신분과 지위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주몽일행이 부여의 경계를 벗어날 즈음 태자 대소의 명령을 받은 부여 병사들도 이미 큰 강 엄리대수 근처에 이르고 있었다. 추격자들의 말발굽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가 되자 주몽이 활로 강물을 때리면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 중에 쫓는 자가 이르렀으니 어찌하랴" 하였다.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어 무사히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지므로 뒤쫓는 부여 기병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고 한다. 물고기와 자라의 힘을 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주몽일행의 남행길은 쉽지 않았다.부여 병사들의 추격을 간신히 따돌리는 데에 성공한 주몽은 큰 강 건너 큰 나무 아래에서 한 숨을 돌린다. 주몽이 부여에 두고 온 어머니와 아내, 아비 없이 자랄 아내 뱃속의 아이를 머리에 떠올릴 즈음 비둘기 한 마리가 일행의 주변을 맴돌며 난다.
신화 속에서 주몽은 활로 비둘기를 쏘아 떨어뜨린 뒤 죽은 새의 부리를 열어 그 안에서 오곡의 씨앗을 꺼낸다. 비둘기는 오곡의 씨앗을 전하기 위해 어머니 유화가 보낸 전령이었던 까닭이다. 현실세계에서 부여계의 새로운 망명자 집단은 기마술과 궁술이 뛰어난 전사들이기도 했지만 오곡을 심고 거둔 경험이 있는 농업기술자들이기도 했다. 주몽일행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압록강 중류일대의 크고 작은 나라들, 골짜기에 흩어져 살던 마을들에 퍼진다. 새 이주민 집단이 비류수 근처 모둔곡( 谷)에 이르자 이 일대에 흩어져 살던 부여계 사람들의 무리 여럿이 주몽일행에 합류한다. 주몽신화에는 이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베옷 입은 사람, 검은 옷 입은 사람, 물풀빛 옷을 입은 사람이 그들이다. 졸본 땅에 이르자 주몽일행은 마침내 더 나아가기를 멈춘다. 이곳에 뿌리내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졸본에는 이미 수백 년 째 이 땅에 뿌리내린 사람들이 있었다. 이 나라를 그곳 백성들은 스스로 송양국이라고 했다. 송양국의 왕은 자신의 집안이 선인(仙人) 왕(王)을 뿌리로 삼고 있다며 새로운 이주민들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라고 요구한다. 주몽은 자신이 천제의 손자이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졸본 땅의 주인 자리를 놓고 부여로부터의 새 이주민들과 오래 전 이 땅에 정착한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먼저 누가 이 땅의 왕 노릇 하기에 적절한지를 판정 받기 위한 두 집단 지도자 사이의 겨룸이 벌어졌다. 주몽과 송양왕은 둔갑술의 수준을 서로에게 선보였고, 이어 활솜씨를 겨루었다. 신궁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주몽의 활 솜씨는 송양왕의 기를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빼어난 활 솜씨는 하늘 신의 능력, 특별히 해신의 정기를 타고난 자만이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이 부여 사람들에게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인왕검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송양왕은 이제 주몽이 천제의 자손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어렵게 되었다. 주몽 뿐 아니라 오이, 마리, 협보를 비롯하여 주몽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도 활 솜씨, 기마술, 뛰어난 말을 골라내고 훈련시키는 능력, 전사집단으로서의 조직력 등에서 비류수 일대의 패권을 잡고 있던 송양국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다. 주몽은 그 자신이 뛰어난 전사였을 뿐 아니라 빼어난 전략가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다. 먼저 활 솜씨 겨루기로 상대의 기세를 제압한 다음, 송양국의 북과 나팔을 빼와 퇴색되어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썩은 나무로 궁실의 기둥을 세웠다. 송양왕으로 하여금 어느 쪽이 더 오래되었는가를 따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어 흰 사슴을 잡아 하늘에 제의를 올리면서 하늘에서 비를 내리기를 기도한다. 물길을 돌려 송양국의 도읍이 물난리를 겪게 만든 뒤, 구원의 손길을 뻗자 마침내 송양왕은 백성들과 함께 천제의 자손에게 항복하고 나라를 바친다. 망명객 주몽이 마침내 비류수 일대 부여세력의 왕이 되면서 고구려 건국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출처 : 고구려대장간마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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