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6일 10:30시 소천
2020년 10월 20일 삼오제
정충석 박사님 헌시
소천한 부친을 기리며~!
1925년 4월 30일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신 부친께서 2020년 10월 16일 소천하여 영면하시게 되었습니다.
부친의 소싯적 증조부께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두메산골 덕유산 자락의 무주 안성에 신축 한옥을 지어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우리집을 '새집'이라 불렀다.
전통적 유교사상으로 선비정신이 투철한 증조부께서는 장손인 부친을 매우 아끼고 귀하게 여기셨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으로 부친의 삶의 방식에 증조부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말씀을 종종 우리들에게 들려주곤 하셨다.
신문물에 대한 학구열이 높은 증조부께서는 부친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 한다. 당시 일본 중학교(현 고등학교) 과정을 마칠 즈음에 조부(당시 40세)께서 병환으로 위급하여 급거 귀국하여 임종을 맞게 되었다 한다.
장손으로서 가장이 된 부친은 19세의 나이에 초등학교 6학년 담임으로 첫 부임을 받아 교직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6학년 제자들 중에는 기혼자도 있었고, 나이도 부친보다 3세 연하인 학생이 있었다 한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당시 부친은 교감이었고, 4학년 경에 교장이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부친은 30대 후반이었으니 장기집권한 교장이 된 셈이다.
이후 65세까지 46년의 교직생활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임하게 되었다.
부친께서 가훈으로 여겼던 '무실역행'과 '인위덕'에 따라 정직•성실•근면을 강조하셨던바 철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아침 식사시간은 긴장상태의 윤리 도덕시간이 되었다. 특히나 '사나이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의와 타협하면 안 된다.'는 말씀까지 강조하셨다.
엄격하고 완고하신 부친의 성품은 우리들 형제에게도 한결같이 부모보다는 교육자 입장에서 말씀하셨다.
이리하여 부친과 우리 형제간의 관계는 아기자기하고 다정다감한 부자지간의 정보다는 엄격하고 무서운 사제지간의 관계로 평생을 지내왔다.
부친의 일본 유학 동창생으로 유일하게 생존하고 계시고 매스컴에 몇 차례 건강다큐로 소개된 정박사님에 의하면, 부친의 학창시절은 대단하였다 한다. 공부도 잘했고 소설책도 매우 좋아했으며 리더십도 대단하여 당신께서 범접하기 어려웠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다.
부친의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과 글솜씨는 학창시절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새소년'이란 학생잡지에 부친이 기고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을 보고서도 부친의 카리스마에 눌려 직접 부친께 말을 못 하고 모친에게만 조용히 전달한 기억이 있다.
나는 부친으로부터 야단이나 매를 한 번도 맞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부친은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부친의 카리스마에 눌린 나로서는 감히 이탈된 행동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모친 또한 부친의 위신에 누를 끼치는 행실이 있어서는 용납될 수 없다는 사고의 주입이 어린 마음에 세뇌되었다. 따라서 철모르는 어릴 때부터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지냈다는 생각이 든다.
부친의 사고방식에 의문과 반항심이 생기는 사춘기인 고교시절, 부친의 논리에 도전해 보고자 '세계사상전집' 12권과 사서삼경 그리고 원불교성전을 탐독하며 사상무장으로 도전의식을 고취시겼던 적이 있다. 이렇게 용기내어 도전한 나의 논리는 무용지물이 되고 오히려 내가 설득을 당하며, 그 이후로는 줄곧 언행일치를 완벽하게 실천하시는 부친의 뜻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던 부친이 구순에 가까워지니 조금은 부드러워진 듯하여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되었던 나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여쭈어봤다.
교육관이 투철한 교육자이신 부친께서 '왜? 평소에도 공부하란 말씀은 안 하시고 일거리만 시키셨는지'가 궁금하였다. 더구나 다음 날이 시험인데도 공부보다는 담배를 엮어 건초작업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부친께서는 가장으로서 2명의 동생들과 8남매의 자식들을 대학교육까지 시키고자 박봉의 급여로는 턱없이 모자라는 교육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농작물로 보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당시 남들은 우리를 부잣집이라 말하지만 '시골부자는 일부자' 듯이 2명의 일꾼들과 함께하는 농사일의 업무량은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축들, 소, 염소 5마리, 돼지, 거위, 닭 등 동물농장과 같은 부업의 업무관리는 형제들 중 유일하게 시골에 남아 있는 나의 몫이었다.
여유라고는 느낄 수 없는 억척스런 생활은 내가 고2가 돼서야 농사일이 줄어들면서 어느 정도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 여유도 잠시 뒤뜰에는 30여 마리의 꽃사슴들이 새로운 일거리로 등장하였다.
이렇듯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부모님의 생활방식은 우리들에게는 '용돈'이란 사치스런 말의 의미도 모르고 자라게 하였다.
부친은 공식적인 출장을 다녀올 시에도 잔여 출장비를 학교에 반납하시는 그야말로 청렴결백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다. 또한 타인에게는 피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철두철미한 생각으로 언제나 당신께서 베풀고 손실을 감수하는 것이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확고하셨다.
한편 교육철학이 확고하신 부친은 구순을 넘긴 연세에도 명절 때가 되면 시골집에 모인 가족들 중 교직생활을 하는 여동생과 나의 처를 안방에 모아 놓고 교무회의가 이루어지곤 하였다.
교직을 퇴직한 이후에도 구순을 넘길 때까지 유림의 향교 교장으로서 지역사회의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하셨다.
'세월 앞엔 장사가 없다.' 하듯 정정하셨던 부친께서 고령에 의한 원기부족으로 1년이 넘게 요양병원 생활을 하셨다.
평생을 교직자이며 교육자로서의 삶을 이어온 부친께서 비로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저희 곁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에 태어나 모든 생물이 결실을 맺고 풍요로운 계절에 자연의 품에 안기신 '晩翠'(부친의 호)님의 생전의 삶을 기리며 부디 편안한 영면에 드시기를 기원드립니다~!
2020년 10월 20일
불효자 신 원 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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