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숲해설가 모임
○ 숲해설가 모임
• 일 시 : 12월 14일(목) 10:30시
• 장 소 : 탑골공원 (삼일문) : 문화탐방
탑골공원-피맛골-승동교회-경인미술관
• 해 설 : 윤영주 (숲해설가 겸 문화해설사)
고려 때는 흥복사가 있었으며, 조선 초기 1464년(세조 10)에 원각사라 개칭하고 도성 안 제일의 대가람으로 중건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억불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중종 때 이르러서는 원각사 건물이 모두 헐려나가고 빈 터만 남아 있었다.
일반적으로 1897년(광무 1) 재무부 고문이었던 영국인 J. M. 브라운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전해진 것으로 1888년에 개원한 인천의 만국공원(인천 자유공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며, 탑골공원은 서울 최초의 공원이라 해야 옳다. 또한 공원의 개원연도도 1895년이나 1896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특히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민족해방운동의 발상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1992년 5월 28일 탑골공원이라 개칭되었다. 1980년대초 공원을 막고 있던 파고다 아케이드를 철거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공원부지를 확장했으며 서문, 북문 등을 복원하고 공원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투시형 담장이 설치되었다. 한편 1987년부터 무료로 개방되어 도심 속의 휴식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공원 내에는 팔각정을 중심으로 원각사지10층석탑(국보 제2호),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동상, 한용운 기념비 등이 있다. (출처 : 다음백과)
피맛골 : 서울시 종로구 166번지 일대로 종로1가에서 종로6가까지 이어지는 비좁은 골목길이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애용하던 뒷골목인데, 당시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말을 탄 고관대작을 만나면 행차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다. 때문에 갈길 급한 서민들이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이용했는데 피마(避馬)에서 유래해 이름이 붙었다. 1980년대 도심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었고, 2003년 서울특별시 건축위원회에서 재개발을 허가했다. 그러나 공사 현장에서 조선시대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고, 역사적인 전통거리가 사라진다는 비판이 거듭 재기되었다. 이에 종로2가에서 종로6가에 걸쳐있는 피맛골은 수복재개발구역으로 지정해 예전 피맛골의 모습을 재현하기로 했다. (출처 : 다음백과)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 교회이다.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등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모교회로 일컬어지고 있다.
1893년 6월, 사무엘 포먼 무어(Sammuel Forman Moore, 모삼열) 선교사는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 부지에 예수교학당과 교회를 설립한다. 이 교회를 '곤당골교회'라고 명명하였으며, 이 교회는 승동교회의 모체가 된다. 따라서 승동교회는 1대 당회장을 모삼열 목사라고 이야기한다.
이후 곤당골교회는 1901년에 제중원 옆 부지(現 을지로2가)로 성전을 이전하였다. 당시, 안수를 받은 한국인 목사가 없어서 1902년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인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이눌서) 목사는 곤당골교회 담임목사로, 찰스 알렌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곽안련) 목사는 곤당골교회의 부목사로 부임하였다.
설립 초기 당시 유교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상당히 파격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당시 계급사회에서 천민 중 천민으로 하대당했던 백정도 양반 계급의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당연히 양반들의 반발이 극심했고, 백정들과 예배를 못 드리겠다며 교회를 떠났던 교인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
1902년 부목사로 부임한 곽안련 목사는 교인들 간 계급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지적을 하며 "백정 문제가 우리 교회에서는 제일 어려운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백정들에게 전도하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하는 문제와 또한 박씨 형제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까지는 교회 조직이 잘 안될 모양이다"라고 까지 했다.
1905년 8월 1일, 인사동(당시 지역명 : 승동)으로 성전을 이전하여 현재까지 그 역사가 흘러오고 있으며, 찰스 알렌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곽안련) 목사가 승동교회 3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1906년 위임되었다.
1909년,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한 '안동교회'를 개척하여 1911년에 독립시켰다. (출처 : 나무위키)
가장 오래된 한옥미술관
북촌을 헤맨다. 한옥을 찾는다. 아파트에서 자란 이들에게 한옥은 낯선 건물이다. 외갓집의 정서도 옛말이다. 이미 한 세대를 더 지났다. 이젠 외갓집도 아파트다. 한옥은 그 유려한 선과 다채로운 문양이 꽤나 매력 있다. 그것이 우리 문화란다. 전통이란다. 호기심이 생길 밖에. 그래서 북촌의 정서를 탐하는 건 10대나 20대다. 신기하다. 또는 어슴푸레한 추억을 가진 30대다. 아련하다. 40대 이상은 대체로 일본 관광객이다.
덩달아 한옥의 재활용도 이루어진다. 한옥 레스토랑이다. 한식이 아니라 양식을 낸다. 우리네 공간에서 파스타나 피자를 담는다. 낯선 듯 친근하다. 새로운 체험이다. 한옥 갤러리도 기세다. 북촌 일대에 새로 생겨난 갤러리는 한옥이 많다. 서까래를 살려 천장이 높다는 장점이 갤러리와 잘 맞아떨어졌다. 칸과 칸을 개방해 전시관을 여니 공간의 리듬감이 생긴다. 전시의 테마마다 새로운 조합이 탄생한다. 은근한 자부심이 인다. 세대를 초월해 한옥에 빠져드는 이유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늘 가까이에 있었다. 어떤 세대는 알지 못하고 또 아는 세대는 오랜 시간이 지나 잊었다.
경인미술관이 대표적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미술관이다. 1983년에 개관했다. 어언 30년에 가깝다. 오랜 시간 관훈동 30-1번지에 그대로다. 미술계가 요동을 치고 미술의 중심이 인사동을 지나 사간동과 청담동을 넘나들어도 그 자리다. 그런데 적잖은 이들이 모른다. 인사동의 어디쯤인지 모른다. 경인미술관의 한옥에 깃든 깊은 역사를 모른다. 그 이름은 알지만 가본 적 없는 이가 훨씬 많다. 개관 10년 후에 태어난 이들이 곧 대학생이다. 1983년에 태어난 이들은 이미 직장인이다. 모를 수밖에. 그저 고리타분한 옛 미술관일밖에. 언론이나 방송에서 다루기에도 새삼스러운 아이템이다. 다 아는 곳인데! 그런데 제대로 모른다.
마당 넓은 정원의 집
석정길에서 샛길로 숨어든다. 개성만두 ‘궁’이다.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만두집 가운데 하나다. 블로그의 맛집 정보에 수시로 등장한다. 이제 임명숙 할머니가 직접 만두 빚는 모습은 볼 수 없다. 그래도 그 맛은 3대를 이어 여전하다.
맞은편이 경인미술관 입구다. 궁에 비해 유명세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명소다. 하지만 궁을 찾았다 경인미술관을 찾거나 ‘여기구나’라며 들르는 이들도 많다. 시나브로 잊힌 까닭이다. 만두 맛만 보고 돌아서기에는 너무 아쉽다. 이미 알고 있더라도 모처럼 다시 찾아볼 만하다. 익숙해서 뜸하지만 다시 보면 새롭다. 옛사랑처럼 아련하다. 그리운 향수도 더해지겠지. 추억 한자락도 떠오르려나.
경인미술관은 여느 한옥 갤러리와 다르다. 마당 넓은 집이다. 너른 정원이 매혹이다. 틈새마다 꽉 들어찬 초록빛이 곱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한옥과 전시관들이 자리한다. 작은 공원이다. 사이사이 잠깐씩 앉아서 쉴 수 있는 자리도 많다. 눈길 끄는 조각품이나 옛 소품도 적잖다. 어느 한옥 갤러리가 이리 너른 정원을 가질까. 30년 가까이 지났어도 경인미술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다.
전시관으로 들어서기에 앞서 잠깐 정원을 유랑한다. 거짓말 같다. 인사동의 한가운데 옛날의 정원이다. 발끝에 닿는 흙과 나무와 돌의 계단이다. 집을 나서 처음으로 밟는 흙이라니. 이것이 서울의 삶이겠지. 정원 구석 어디에 가만히 앉는다. 전시관의 처마 아래 툇마루거나 정원의 야외 탁자 곁이거나, 어느 목재 데크거나 별장 같은 정자 아래거나. 은은한 풍경 소리 귓가를 헤맨다. 경인미술관의 기억이 차례차례 떠오른다. 예전에는 제1전시관 옆의 뒷문으로도 드나들었었지. 지금은 벽이 생겼구나. 그 한가한 누림은 이제 도심에서 좀체 맛볼 수 없는 나른함이다.
제3전시관에 자리한 한옥전시관도 새롭다. 1999년까지는 부마도위 박영효의 고택이 있었다. 1977년에 지방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된 서울시 문화재다. 1800년대 지어진 건물로 서울의 8대가 가운데 하나로 손꼽혔다. 2천여 평에 이르던 본채는 갑신정변 때 불탔고 사랑채만 남았다. 말이 사랑채지 그 또한 여느 고택의 본채를 넘어서는 규모였다. 1983년 이금홍이 매입해 경인미술관의 제3전시관으로 사용했다. 지난 1999년에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해 서울시에 기증한 후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겼다. 현재의 제3전시관은 소실됐던 별당채 등을 복원해 새로 지어졌다. 하지만 박영효 가옥의 자취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향이 어우러진 정원을 바라보며
경인미술관은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500평의 넓은 대지를 활용해 다섯 장소의 독채 전시관을 가진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제1전시관은 100평 규모의 2층이다. 경인미술관에서 가장 크다. 대작이나 단체전 전시가 주로 이루어진다.
제2전시관은 그 곁이다. 경인미술관의 전시관 가운데 그 구조가 가장 아름답다. 경인미술관에서도 꼭 들러볼 전시관이다. 내부는 70평 규모의 복층구조다. 전시관의 가장 큰 특징은 바닥에 뿌리내리고 자란 나무다. 입구로 들어서자 마주한다. 복층의 2층도 나무의 수형을 피해 자리했다. 천장의 일부와 입구 쪽은 유리 재질을 사용해 자연채광이 가능하도록 했다. 전시관은 반듯한 사각의 구조로 어디에서건 돌아서면 나무와 눈이 마주친다. 나무 한 그루가 전시관의 풍경을 바꿨다. 따뜻한 발상의 전환이다. 사무실 1층을 이루는 아틀리에와 그 곁의 제5전시관에도 다채로운 전시가 열린다. 각 전시관이 별채로 운영되어 서로 다른 테마의 전시가 열리는 것도 흥미롭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색깔의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경인미술관의 유명세에는 전통다원이 한몫을 톡톡히 한다. 한옥의 전통찻집이다. 제3전시관의 곁이다. 안쪽의 너른 다실은 입식이다. 하지만 예스럽다. 격자 무늬 문살이 천장을 대신한다. 족자와 병풍, 난초와 도예품 등으로 꾸몄다. 탁자와 의자도 고풍스럽다. 낡은 목재로 이루어진 바닥이야. 한옥의 창가와 접한 좌식의 다실도 있다. 다원에서 가장 사랑 받는 자리다. 한 번 앉으면 좀체 일어날 줄 모른다. 그러니 누군가 앉아 있거들랑 다른 자리를 찾는 게 현명하다. 전통다원은 15종의 우리나라 전통차를 낸다. 정원을 바라보며 전통차의 향기에 젖는다. (출처 : 다음백과)